— 꽃가루와의 35년 전쟁, 나는 아직 지고 있다 —
세상 사람들이 봄을 사랑한다는 걸 나는 안다.
따뜻해지는 공기,
화사하게 피는 꽃들,
어딘가 들뜨는 그 느낌.
봄이라는 계절이 이렇게 사랑받는 이유를 나는 이론적으로 충분히 이해한다.
다만 나에게 봄이란 전쟁 선포 시즌이다.

3월 초,
어딘가에서 꽃가루 예보가 뜨기 시작하면 나는 즉각 전투 태세에 들어간다.
마스크를 꺼내고, 항히스타민제를 챙기고, 코 세척용 식염수를 넉넉하게 구비한다.
마치 태풍 오기 전 라면 사재기하듯.
비염인 여러분, 꽃가루 예보 앱 하나쯤은 깔려 있죠?
'오늘 꽃가루 농도 매우 높음'이라는 알림이 뜨면 그날 외출 계획을 재검토하는 그 삶.
일반인들에겐 그냥 날씨 앱인 게 우리에겐 생존 지침서다.
초등학교 때 봄 소풍은 나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특별히 좋다는 게 아니라, 특별히 힘들다는 의미에서.
선생님은 신나서 '오늘 봄 소풍이다!' 하시는데, 나는 속으로 '아, 오늘 콧물 많이 흐르는 날이구나'를 생각했다.
벚꽃 아래서 단체 사진 찍을 때, 다들 활짝 웃는데 나는 코를 틀어막고 있었다.
사진 찍는 그 0.5초 동안도 콧물이 흐를 수 있거든.
웃는 척하면서 콧물 안 흐르기를 기도하는 그 미묘한 긴장감, 비염인들은 알 거다.
고등학교 때는 더 복잡해졌다.
봄에 집중해야 할 시험이 몰려 있는데,
비염약을 먹으면 졸리고,
안 먹으면 콧물이 흐르는 이 딜레마.
이거 비염인들만 아는 그 지독한 선택지다.
'졸리지만 코는 멈추거나, 맑은 정신으로 코를 흘리거나.'
둘 다 공부에 지장을 준다는 건 마찬가지인데.
나는 결국 중간 방법을 택했다.
졸음 부작용이 적다는 2세대 항히스타민제로 바꾸고, 코 세척을 아침저녁으로 했다.
이게 바로 비염인의 '최적화된 삶'이라는 거다.
완벽한 해결이 아니라, 최소한의 피해로 버티는 기술.
지금도 봄이 되면 남편이 먼저 말한다.
"여보, 꽃가루 예보 심하다던데 마스크 챙겨."
남편도 이제 꽃가루 예보를 확인한다.
비염인과 결혼하면 파트너도 반 비염인이 되는 것 같다.
근데 요즘은 마스크 쓰는 사람이 많아져서 그나마 덜 눈에 띈다.
코로나 이후로 마스크 문화가 자리 잡으면서 나는 솔직히 조금 편해졌다.
이게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지.
전 세계가 힘들었던 그 시간에 나는 '드디어 마스크 쓰는 게 이상하지 않은 시대가 됐다'며 속으로 안도했으니.

봄아, 나는 너를 사랑하고 싶은데 네가 자꾸 나를 공격하네.
우리 이제 좀 화해하자.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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